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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음악이야기
요한 스트라우스 2세 - 왈츠의 왕 본문
"내가 이런 곡을 한 곡만 쓸 수 있다면 나머지 다른 작품은 다 내버려도 상관 없겠다"
- 요하네스 브람스 -
오스트리아의 경음악 / 오페레타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왈츠의 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19세기 유럽의 무도음악계에서 지배적인 위상을 누린 거장이었다.
애칭은 샤니(Schani).
어린시절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부터 이미 빈에서 날리던 경음악 작곡가였던 탓에 그 가업을 쉽게 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아버지 요한 1세는 자식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음악을 하는 것을 격하게 반대했다. 특히 장남 요한 2세는 은행에 취직시키려고 온갖 술수를 다 썼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기초적인 음악 이론이나 바이올린 연습 등 취미삼아 음악하는 것까지 반대하지는 않았는데, 자식들이 이걸로 밥벌이를 하려는 낌새만 보이면 불호령을 내리거나 폭력을 휘두르기까지 했다. 예로 요한 2세의 경우, 아버지의 눈을 속여 전문가 수준까지 바이올린을 배웠다는 이유로 채찍으로 심하게 맞아 기절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항상 곡 주문 받으랴 무도회장 출연하랴 정신없던 아버지가 아들들이 뭐하는지 일일이 알아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요한 1세는 외도하던 여자와 바람을 피운 끝에, 가정을 포기하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면서 막강한 통제력도 잃게 되었다. 이후로 요한 1세의 아들들은 거리낌없이 대놓고 음악을 배우고 연주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음악활동
아버지의 뜻을 제일 먼저 거스른 것은 요한 2세였고, 1844년 10월에 빈 근교의 히칭에 있는 유명한 도박장 겸 무도회장이었던 돔마이어 카지노에서 자신의 악단을 조직해 출연했다. 연주곡들도 대부분 직접 작곡한 왈츠나 폴카 등이었는데, 아직 20대도 안된 초짜였음에도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요한 2세가 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본의아니게 부친 덕을 입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후 죽을 때까지 일거리 없어서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을 만큼 각지의 무도회와 여타 공연에 불려다니면서 수백 곡이나 되는 춤곡들을 작곡했고, 아버지의 명성마저 넘을 정도의 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미 불륜을 저지른 아버지로서는 뭐라고 태클을 걸기 힘든 상황이었고, 결국 부자 간의 거듭되던 경쟁 끝에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대립 관계가 끝나게 되었다.
요한 1세 사후에는 아버지의 악단을 자신의 악단에 그대로 흡수해 규모를 더욱 키웠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몰래 음악을 배워왔던 차남 요제프 슈트라우스와 4남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까지 끌어들여 '슈트라우스 형제' 로 빈의 사교계를 석권했다. 하지만 대중적 인기와 달리, 황족이나 귀족들로부터는 '공화주의자' 라는 이유로 요주의 인물로 찍혀 궁정무도회 감독 같은 알짜배기 직책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 잠시 있었다. 반대로 요한 1세는 보수적인 황실 지지파였고, 부자간의 대립은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도 격하게 진행됐다.
1870년에 동생 요제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에는 무도회 출연 횟수를 줄이기 시작했고, 프랑스의 자크 오펜바흐가 석권하던 장르인 오페레타의 작곡에 뛰어들었다. 춤곡 대부분이 폭발적인 인기를 자랑하던 것과 달리 오페레타는 실패작도 있었고 뜨뜻미지근한 평을 받은 범작도 있었는데, 성공했던 아니었건 그 오페레타에서 선율을 뽑아 행진곡이나 춤곡 등으로 2차 창작을 하는 식으로 경음악계의 명성을 유지하는 약삭빠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빈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전역에 유명세를 떨치면서 아버지처럼 해외 순회공연까지 했는데, 폴란드나 독일, 프랑스, 러시아 뿐 아니라 대서양 건너 미국에까지 가서 공연할 정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1860년대에는 황족과 귀족들도 슈트라우스의 재능을 무시못할 정도로 거물급 인사가 되었고, 1863년에 오랫동안 노려왔던 궁정무도회 감독에 임명되었다. 슈트라우스는 젊었을 적에 공화론자였기는 했지만, 높은 지위에 대한 야망도 컸던 인물이었다.
결국 자신의 명성이 세계적으로 퍼져나갈 정도였던 무시못할 인기를 이용해 황실에 컨택을 시도했고, 결국 성공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도 요한 2세의 음악을 높이 평가했고, 오페레타 '니네타 공비'초연 때는 극장의 특별석에서 관람한 뒤 요한 2세를 불러 직접 축하해주기도 했다.
1899년 폐렴으로 타계할 때까지 18편의 오페레타와 500여 곡의 춤곡/행진곡 등을 남겼는데, 개중에는 바쁜 순회공연 일정 때문에 구작들에서 땜빵하고 짜깁기하거나 미국과 러시아 등에서만 출판된 곡들, 다른 작곡가의 소품 편곡 같은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사후 오스트리아 전체가 국상 분위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고 장례도 성대하게 치러졌다.
날카로운 독설 비평으로 유명했던 음악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도 마치 황제 사후에나 걸맞을 듯한 통절한 추도문을 발표할 정도였다. 유해는 빈 중앙묘지에 안장되었고, 묘소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금빛 동상의 간지로도 유명하다.
[출처 : 나무위키 ]
음악가로 자리잡은 부친이, 자기의 명성을 빼앗길까봐 자녀들의 음악활동을 강하게 막다니... 진짜 생각할수록 황당한 요한 스트라우스1세. 그러한 환경속에서도 음악에 대한 공부를 놓지 않고 해 온 그 자녀들도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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